기사제목 예수님의 눈물 (요한복음 11:32-44) 설교 : 일산명성교회 문성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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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 (요한복음 11:32-44) 설교 : 일산명성교회 문성욱 목사

기사입력 2017.05.1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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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jpg▲ < 예화 / 탈무드 :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 >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맨 처음 천사는 다이아몬드를, 두 번째 천사는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가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으셨는데 세 번째 천사가 가지고 온 ‘죄인들이 참회할 때 흘린 눈물을 담은 그릇’을 보시고 매우 흡족하게 여기시며 “네가 가장 귀한 것을 가져왔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 예화 / 탈무드 :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 >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맨 처음 천사는 다이아몬드를, 두 번째 천사는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가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으셨는데 세 번째 천사가 가지고 온 ‘죄인들이 참회할 때 흘린 눈물을 담은 그릇’을 보시고 매우 흡족하게 여기시며 “네가 가장 귀한 것을 가져왔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눈물이 있습니다. 슬픔의 눈물, 아픔의 눈물, 반가움의 눈물, 환희의 눈물, 참회의 눈물, 억울한 눈물, 남몰래 흘리는 눈물, 승리의 눈물, 생리적인 눈물 등이 있습니다. 이런 많은 눈물 가운데 가장 값진 눈물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모든 눈물은 그 자체로 값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귀중한 것입니다. 값지고, 값 싼 것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눈물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자기를 위해서 우는 눈물이요, 또 하나는 남을 위해서 우는 눈물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우시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서 먹을 게 없어도 아무리 매를 맞아도,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울지 아니하셨고,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예수님은 울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위해서 우셨습니다. 나보다 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 더 고통을 받는 사람, 더 외로운 사람, 병든 사람, 슬픈 사람을 위해서 우는 눈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크게 두 번 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실 이유가 하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서 울지 아니하셨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루살렘 부근 베다니에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동네에서 전도하고 계실 때,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지 못하셨고 그 사이 나사로는 죽었고 죽은지 나흘이 되어 벌써 시체에서 냄새가 나는데 그때서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르다와 마리아와 많은 조문객들도 웁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도 우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묻혀 있는 돌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신 후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실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되어 냄새나는 몸을 이끌고 걸어 나오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눈물.jpg▲ 예수님의 눈물은 자비와 긍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바로 약한 자, 슬퍼하는 자, 병든 자, 죽음을 앞에 놓고 절망에 빠져있는 자에게 자비와 긍휼을 보여주심을 의미합니다. 이 긍휼이라는 것은 동정심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조건 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긍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자비와 긍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바로 약한 자, 슬퍼하는 자, 병든 자, 죽음을 앞에 놓고 절망에 빠져있는 자에게 자비와 긍휼을 보여주심을 의미합니다. 이 긍휼이라는 것은 동정심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조건 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긍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십니다. 긍휼은 고난당한 자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한 상황 속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슴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사람, 그게 참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서 누군가가 생명이 관계된 일로 울면 주님의 마음이 약해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물에 함께 참여하면서 그들의 슬픈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의 딸이 병들어서 죽어갈 때, 예수님 앞에 달려와서 고쳐주시기를 원합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으로 갔는데 가는 도중에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신 후 집으로 들어가 죽은 어린아이에게 손을 대시며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니 금방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성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내용이 있습니다. 죽은 아들의 상여를 뒤따라가며 통곡하는 과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우는 모습을 보더니 가까이 가셔서 여인을 향하여 “울지 말라”고 달래시면서 관에 손을 대시며, 관속에 누워있는 시신을 향하여, “청년아 내게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때 이 청년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십니다. 그래서 눈물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나의 눈물의 기도에 사무엘을 주셨고 다윗의 눈물의 기도에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하셨고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에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하셨고 베드로의 회개의 눈물에 부활 후 제일 먼저 그에게 나타나시고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하는 가족, 즉 남편과 아내 자녀를 위해 눈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의 가족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용서가 있고, 화해가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은 이십에 노예상인들에게 팔리고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보디발의 가정총무가 되고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계시의 지혜를 얻어서 7년 풍년동안 양식을 저장했다가 7년 흉년을 대비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지혜로운 요셉 덕에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 양식이 떨어져 양식을 위해 애굽에 온 자기의 형들을 보고 골방에 들어가서 막 울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이전의 사람이지만 그는 십자가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끌어안고 울었고 다른 열 명의 형들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용서가 되었고,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마음에도 평안이 왔고, 불안에 떨었던 열 명의 형들이 다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이 있는 곳에 화해가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만나서 서로 끌어안고 실컷 울더니 원수가 친구로, 형제로 바꾸어졌습니다. 눈물은 이처럼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눈물과 은혜는 정비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 많은 사람에게 눈물이 많습니다. 찬송만 불러도 눈물, 성경만 읽어도 눈물, 설교만 들어도 눈물, 기도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는 사람은 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우는 날이 많았습니다.(히5:7) 십자가를 지고 만민의 죄를 사하는 희생제물이 되시려 눈물 흘려 기도했습니다. 사명 감당을 위한 기도, 그리고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함께 우셨던 주님, 멸망해 가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우셨던 주님이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왜 우셨습니까? 그들을 회개코자 보냈던 선지자들을 외면하고 돌로 쳐 죽이고 직접 오신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얼마 후 하나님의 진노로 이 성이 다 멸망하리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위기로 인한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인한 갈등의 최고조에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슬픔을 당한 우리 이웃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예수님처럼 우리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셨던 것처럼 이웃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 눈물은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내 이웃의 마음에 천국을 만들어줍니다. 슬픔을 나눔으로 기쁨을 회복하는 능력이 되고, 고통을 나눔으로 영광을 회복하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시편126:5-6) 내 죄를 통회하면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나, 내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 이 거룩한 눈물에는 절대로 거저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린 만큼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주님의 놀라운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스님.jpg▲ < 예화 / 일본 승려 양관화상 > 일본에 양관화상이란 저명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집 불량한 아들을 데리고 3개월간 한 방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스님은 3개월이 지나도록 꾸중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이 아들도 조금의 뉘우치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 예화 / 일본 승려 양관화상 >

일본에 양관화상이란 저명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집 불량한 아들을 데리고 3개월간 한 방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스님은 3개월이 지나도록 꾸중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이 아들도 조금의 뉘우치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을 맡긴 아버지도 스님의 무관심과 침묵에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3개월이 지나고 스님이 절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 아들이 스님을 전송하러 나왔습니다. 스님이 신발 끈을 메다 말고 그 집의 아들에게 좀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허리를 구부려 신발 끈을 메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손등이 뜨거웠습니다. 스님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그 집의 아들은 스님에게 감화되어 새 사람이 되어 바르게 살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될 수없는 강퍅한 인간일지라도 눈물이 있는 곳에는 변화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눈물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길이 없는 우리 인간을 위해 흘리신 눈물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눈물을 본받아 우리 자신과 가정을 위해, 우리의 이웃을 위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 흘려 기도함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일산명성교회 문성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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