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내 삶의 길을 바꾸게 한 군대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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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길을 바꾸게 한 군대생활

기사입력 2017.10.0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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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1.jpg▲ 어쩌면 군대 생활이 나를 공무원의 길로 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평생 농부가 되어 살아가려고 했던 나에게 군 복무기간이 농사와 떨어지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함으로써 다른 길을 선택하도록 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 사진:픽사베이
 


어쩌면 군대 생활이 나를 공무원의 길로 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평생 농부가 되어 살아가려고 했던 나에게 군 복무기간이 농사와 떨어지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함으로써 다른 길을 선택하도록 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참 무더운 때 모내기를 모두 마치고 1978년 6월 8일 무덥기로 유명한 대구 50사단에서 무더운 여름날 8주간의 신병교육을 마치고 자대 배치 전에 의정부 103보 보충대로 이동했다. 

의정부에 와서 하루를 자고 나니 다음날 함께 훈련을 받았던 동기들은 모두 자대로 배치되어 가고 동기 6명만 남게 되었다. 들리는 이야기가 관광버스가 온다고 하는데 관광버스를 타면 최전방으로 배치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우리를 태우러 온 차는 트럭이었다. 우리 동기 6명과 다음날 새로 온 병력 몇 명을 태운 차가 서울을 지나 수원 쪽으로 향해 가기에 용인 3군사령부로 배치되는가 싶었는데 차는 99여단에 일부 병력을 내려놓고 다시 안양으로 향했다. 안양으로 가서는 우리 동기 6명을 내려놓고 차는 떠났다.

함께 배치된 동기 중에 한 친구가 훈련소에서 식판으로 동기의 머리를 내쳐서 피를 많이 흘리게 한 적이 있다. 그 친구와 같은 부대에 배치가 되었을 때 3년 동안 어떻게 지내야하나 하는 걱정도 했었는데 함께 근무를 하다보니까 심성도 착하고 좋은 친구였다.

군 생활을 마치고도 가장 많이 만나는 친구가 그 친구다.

배치된 부대는 훈련소와는 달리 건축물들이 2층으로 지어져 있고 내무반에 스팀도 설치가 되어 있었다. 경비중대로 배치되었는데 다행히 바로 위 선참과 13개월이나 차이가 났다. 오랜만에 받는 졸병이라 그런지 선참들은 우리를 반갑게 환영해 주었다. 동기도 6명이나 되고 모두 고향이 용인이다 보니까 서로가 친했고 함께 초· 중·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도 세 명이나 함께 배치되었다.

신고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군인교회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중대 바로 뒤에 교회가 있었다. “교회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더니 선참 한 명이 “야! 네가 교회에 가면 누가 청소를 하냐?”며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선참들이 다녀오 라고 허락을 하여 교회에 갈 수 있었다. 군에 입대할 때 “군에 입대 하더라도 교회에 나갈 수 있는 부대에 배치되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했었는데 교회에 다닐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여 교회에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같은 내무반에 배치된 동기 한 명이 마음 좋고 나를 이해해주어교회에 가는데 큰 애로를 느끼지 않았다. 교회에 가는 날은 미리 서둘러 청소도 하고 관물도 정리 정돈해 놓으니까 선참들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교회에 가는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교회에 가서 찬송가를 부를 때는 온갖 시름을 잊어버리는 것 같았 다. 그래서 교회에 머무르는 시간은 점차 늘어났고 신우회 임원으로 활동도 하면서 내 평생 신앙생활을 하며 살리라 마음먹었다.
부대 내에는 여군들도 배치되어 있었고 그중에 교회에 나오는 여군이 7명이나 되었다. 연말이나 크리스마스 때는 함께 야간에 초소를 돌아다니며 근무자에게 커피도 타주고 캐럴 송을 불러 주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대령 한 분이 오시더니 “야, 이 새끼야! 지금 뭐하는 거야?”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
고 그 대령 앞으로 가서는 “참모님.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고는 참모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한참동안 말이 없어 다시 한번 물어 보았다 “참모님.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했더니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보시다가 참모님은 돌아가셨다. 다음날 작전참모 님이 나를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이제는 큰일 났구나 잘못하면 영창 가겠구나 하는 걱정을 하며 작전참모님 앞에 가서 인사를 했더니 참모님이 손을 내밀며 “어제는 내가 잘못했다”하시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참모님은 진급하여 장군이 되셨 다. 같은 부대의 참모장으로 승진하신 것이다. 어느 날 중대장님이전 중대원 기합을 주려고 집합시켰다. 나도 함께 집합했는데 참모 장님이 나를 찾으신다는 연락이 오자 중대장님이 가보라고 하여 참모장님이 계신 지하 벙커까지 가보게 되었다. 벙커로 이동하는데세 번이나 검문을 받아서야 참모장을 만날 수 있었다. 일등병이 참모장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참모장님을 뵙고 중대로 돌아와 보니 벌 받던 것은 끝나 있었다. 그래서 중대장님께 찾아가서 “저도 벌을 받겠습니다”했더니 이제 다 끝났으니까 돌아가라고 하여 내무반으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같은 내무반에 있는 동기 현우와 탄약고 근무를 설 때가 있었다.

초소 바로 앞에 통신대 훈련장이 있었는데 발에 삐삐선을 걸고 손으로 요대 같은 끈을 갖고 발과 손을 교대로 옮겨가며 전봇대에 올라가는 훈련을 받는데 올라가지 못해 벌을 받는 것을 보고 현우와 누가 먼저 올라가는지 내기를 했다. 전봇대 끝까지 올라가기는 했는데 내려오는 방법을 몰라 위에서 밑으로 뚝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오른쪽 발이 퉁퉁 부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 사실 대로 얘기하면 혼날까봐 그냥 아침에 일어나니까 이렇다고 했더니 의무실에 가보라고 했다. 의무실에 갔더니 수도통합병원으로 데려 갔는데 수도통합병원에서는 엑스레이를 촬영하고 검사를 하더니 깁스를 해줬다. 의무실에서 동기 현우와 고참이 타다주는 밥을 먹으며 두 달을 보내기도 했다. 그 때 후유증인지 요즈음 오른쪽 발목이 가끔 시큰거린다.
하루는 소대원들은 점심을 먹고 군화를 신은 채 관물대 쪽에 머리를 두고 침상에서 누워서 자고 있고 나는 창가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방독면 점검을 나왔다. 나는 졸병들을 깨우지 않고 방독면을 하나씩 꺼내주다가 반합을 잘못 건드려 떨어졌다. 깜짝 놀란 동기 현우가 일어나면서 입에서 이빨 두 개를 내 뱉었다. 반합이 떨어지 면서 현우 이빨 두 개를 부러뜨린 것이다. 방독면 점검을 하러왔던 점검반은 그냥 나갔고 현우를 데리고 의무실로 갔다. 치과 군의관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백금 두 돈을 사오라고 했다. 집에 전화를 해서 20만 원을 보내라고 했다. 며칠 후 친구 애인이 돈을 가지고 면회를 왔다. 현우는 그때 치아를 한 것이 35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튼튼하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임플란트를 한 것인데 그때 이를 정말 잘 해준 것이라고 말한다. 군에 입대하면서 집에서 키우던 큰 소를 23만 원에 팔고 왔으니까 20만 원은 큰돈이었다.
장남인 내가 어머니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부담만 안겨드렸다.

입대해서 제대하는 날까지 내가 할 일은 내가 직접 하기로 마음 먹었고, 실제 내가 선참이 되어 제대하는 날까지 내 식기는 내가 직접 닦았고, 청소하는 시간에는 함께 청소를 했다. 군화를 닦거나 옷을 다리는 일 등 사적인 심부름은 절대로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하니 바로 밑에 있는 졸병들이 불평을 했다. 최고 선참인 내가 계속 직접 식기도 닦고 내무반 청소도 하니까 자기들도 안 할 수 없어 자기 일을 후임 병에게 시키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 해야만 했다.
아마도 내가 군에 입대를 하지 않았다면 농사를 짓고 있을 것이 다. 무공해 식품을 생산하겠다며 농약도 안주고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을 것이다. 군 생활을 하면서 농사일과 끊어지는 바람에 끝내 농사일과 멀어지게 된 것 같다. 앞으로라도 기회가 주어지면 농사 일을 해보고 싶은 것이 현재의 심정이다. 최소한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서 주변에 두릅, 더덕도 심어 놓고 작은 밭에는 농약을 주지 않은 채소도 심어 마음 놓고 채소를 먹고 싶다.

어떻게 보면 군 생활이 나를 전혀 다른 길로 가게 했는지도 모른 다. 군 생활이 없었더라면 풀무원에 일 년에 몇 번씩 갔을 것이고 풀무원 식구들과 만나다 보면 무공해 농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정보도 나누고 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일을 좋아했으므로 그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군복무를 마친지 3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동기들을 만나고 있다.

지금까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수도권에 있는 용인이 고향 이고, 제대 후에도 멀리 흩어져 살고 있지 않고, 서로가 원만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동기들이 모이면 동기 6명 중에 군번이 제일 빠른 내가 고참 행세를 한다. 나는 군번이 진섭이보다 1번이 빠르 다. 군번이 단 1번 차이로 제일 빠르다는 이유로 자대배치 신고, 외박신고, 휴가신고, 전역신고를 모두 내가 했다.

군대동기들을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만난다. 만나면 지난날을 떠올리게 된다. 지난 여름 영렬네 집 앞마당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서 술 한 잔 마시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며 군대 얘기를 했다. 진섭이가 영렬이에게 진돗개와 싸움개 사이에서 태어난 강아 지를 선물하면서 육팔이라고 이름을 지어 줬다고 한다. 6월 8일에 입대를 했다고 해서 육팔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요즈음 TV에서 진짜사나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유격훈련, 공수훈련, 해병대 훈련 등 군대생활 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 훈련이 아니고 방송을 위한 훈련이라 그런지 진짜 군대 맛은 떨어진다.
다들 다시 군대에 가라고 하면 다시는 못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다시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내 나이 60을 바라보고 있어 몸이 따라줄지 모르지만 이제는 공수부대나 해병대에서 극한 상황을 이겨내는 훈련을 해보고 싶다.
지금도 동기들이 모이면 군대생활 이야기를 많이 한다. 

훈련소에서 진섭이가 식기로 동기를 때린 얘기, 못되게 굴었던 고참 얘기, 잘해줬던 이천 출신 강문희, 김용환, 최영수 병장 얘기, 하사 차출에 가지 않으려고 안경을 빌려 썼던 얘기, 유격훈련 얘기, 군번 1번 빠르다고 내가 너무 고참 행세를 한다느니 얘기를 하다보면 끝이 없다. 군대생활 중 마지막으로 모셨던 서만석 중대장을 찾아보자고 했지만 찾기가 쉽지 않다. 군대생활 할 때 중대장님이 관사를 자주 데려 갔었는데 관사에 가면 사모님이 밥을 해주셨고 어떤 때는 군인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중대장 처제가 밥을 해 줄 때도 있었다. 중대장님은 처제와 결혼하라는 말도 하셨다. 군대생활을 할때는 힘들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김운영작가/최창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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